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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이 선택한 조은희

  • 이현중 편집위원
  • 등록 2020-12-28 10: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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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패한 문학소녀는 어떻게 성공한 행정가가 되었나
  • 시·도 측량업 등록사무, 인구 50만 이상 대도시 시장도 할 수 있도록 사무 이양

구청장이 된 국문학도

 

조은희 서초구창정은 자신이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인연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음을 스스럼 없이 공개했다. 이미지는 조은희가 최근 펴낸 책인 「귀를 열고 길을 열다」의 표지“DJ는 언론 매체가 얼마나 힘이 있는지, 기자가 누구인지, 그런 걸 따지지 않고 노력한 사람한테 취재 기회를 주었다. 이 경험을 통해 나는 내 인생을 관통하는 철학을 배웠다. 누구든지 노력한 사람에게는 기회를 줘야 한다는 것이다.”

 

조은희 서울 서초구청장이 최근에 펴낸 자서전 성격의 정치 에세이집 「귀를 열고 길을 열다(도서출판 메디치미디어)」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담담하면서도 따뜻하고 긍정적인 시선으로 평가해놓은 내용의 일부분이다.

 

조은희 구청장이 현재 구정을 이끌고 있는 서초구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가장 잘사는 동네 자리를 놓고서 바로 이웃한 강남구와 오랫동안 치열하게 경쟁해온 곳이다. 더욱이 서초구는 2018년 6월에 치러진 제7회 전국 동시지방선거에서 서울시 관내의 25개 기초자치단체들 가운데 야당인 국민의힘의 공천을 받은 후보자를 유일하게 구청장으로 선출한 지역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단연 부유하고 보수적인 동네의 야당 소속 구청장인 조은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공개적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귀를 열고 길을 열다」의 도입부인 프롤로그에서 생전의 활약상이 구체적으로 소개된 유일무이한 정치지도자가 김대중 전 대통령임을 감안하면, 최근 서울시장 출마를 공식적으로 선언한 조은희가 여의도 정치권에서 흔히 산토끼로 회자되어온 다른 당 유권자들의 표심을 잡으려는 단지 정치공학적 목적으로만 DJ와 자신 사이의 남다른 인연을 자세하게 설명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조은희 서초구청장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마이너리티 겸 아웃사이더로 서슴없이 규정하였다. 그는 한국사회에서 내로라하는 여대의 국문과를 나와 지금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이용구 현 법무부 차관 같은 문재인 정부의 권력실세들조차 다수 거주하고 있을 만큼 대다수 한국인들이 살고 싶어 하는 동네의 지방행정 총책임자로 일하고 있다. 주류 중의 주류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성공한 목민관 조은희’가 겸손하게 비주류를 자처하는 데에는 그의 독특한 개인적 경험이 두드러지게 작용하고 있다.


조은희는 학부를 졸업한 후에 서울대 대학원 국문과에 들어가 석사 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대학입학 시험을 치려고 대구에서 기차를 탔다가 열차의 행선지를 착각하는 바람에 원래의 목적지인 서울이 아닌 남쪽인 밀양으로 내려가는 차마 웃지 못할 촌극까지 본의 아니게 빚었던 경북 청송 태생의 영락없는 시골소녀 조은희는 이즈음까지는 본인이 문학도로서의 삶을 무난하게 살아갈 것으로 아마도 낙관했던 듯싶다.

 

결과적으로 조은희는 박사 과정 진학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출산을 앞둔 불편한 임산부인 몸이었던 터라 시험 준비에 상대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조은희가 20명의 대학원 동기생들 중 출신 학부가 홀로 서울대 국문과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필자에게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그는 마이너리티인 여성이자 아웃사이더인 타교 출신 원생이었다.

 

실패에 대처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끈질기게 재도전하거나, 아니면 깔끔하게 포기하거나. 조은희는 후자의 노선을 선택했다. 그는 글을 쓴다는 것을 제외하면 국문학과는 별로 상관이 없을 분야인 정치부 기자로 인생을 새롭게 시작했다. 문제는 그가 언론인으로 첫발을 내디딘 곳이 마이너 매체일 수밖에 없는 작은 지방지였다는 점이다.

 

조은희는 영남일보 서울주재 기자로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그는 여성, 그것도 아이 딸린 기혼 여성이었기에 마이너 매체 안에서도 필연적으로 아웃사이더 위치를 감수해야 했다. 선배 기자들이 조은희에게 외부로 취재를 나갈 기회를 좀처럼 허락하지 않은 까닭에 그는 사무실에서 다른 기자들이 현장에서 취재한 내용을 전화로 알려오면 이를 글로 정리하는 작업을 도맡다시피 해야만 했다. 그렇게 열심히 기사를 작성했건만 조은희는 한동안 기사에 그의 이름을 올릴 수가 없었다. 그는 말이 기자일 뿐이지, 실제로는 일종의 얼굴 없는 대필작가 즉 고스트 라이터(Ghost Writer)였다.

 

조은희와 추미애는 이렇게 달랐다

 

조은희는 마이너리티의 한계를, 아웃사이더의 장애를 이겨내는 길은 오직 ‘억척이 정신’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곧 남들보다 몇 배 더 노력했다는 의미이다. 그러한 노력을 주변에서 서서히 인정받아 기자로서의 조은희의 위상과 입지는 더욱더 단단해져갔고, 경향신문이 발간하는 시사주간지 뉴스메이커로 회사를 옮긴 그는 당시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 이사장 신분으로 정치적 권토중래를 모색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계복귀 결정 소식을 특종 보도하는 쾌거를 거두게 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실사구시의 정신에 투철한 인물이었다. 조은희는 책에서 자기를 체면보다는 실제를 더 중시하는 실용주의자라고 밝히고 있다. DJ는 후배 정치인들에게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을 겸비할 것을 집요할 정도로 끊임없이 당부했다. 노력이 최고의 스펙이라고 믿으며 지방지 소속의 여기자라는 장애와 한계를 거침없이 정면으로 돌파해온 조은희가 사람 욕심 많기로 유명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눈에 단박에 띄지 않았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노릇이었으리라.

 

조은희는 국민의정부의 초대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발탁된 김중권 전 의원의 추천으로 청와대에서 행사기획비서관과 문화관광비서관으로 근무하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를 조기에 극복하고,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국격을 높이며, 한류의 초석을 다지는 데 조용하면서도 착실하게 힘을 보탰다. 필자가 최광웅 데이터정경연구원 원장의 역작인 「노무현이 선택한 사람들」의 제목을 차용해 조은희를 ‘김대중이 선택한 사람’으로 명명한 까닭이다.

 

조은희는 보수 야당인 국민의힘에 몸을 싣고 있다. 그러나 조은희는 똑같이 TK 출신에, 똑같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름을 받아 정치권에 입문한 추미애 현 법무부 장관과는 완연히 다르게 진영논리에 편승해 나라를 두 쪽으로 갈라놓는 망국적이고 소모적인 막가파식의 무한정쟁에는 가담하지 않고 있다. 김대중이나 조은희처럼 국리민복의 실사구시를 최우선의 가치로 신봉하는 인사들에게 의도적으로 국민들을 갈라치기하면서 자파의 이익을 추구하고 자신의 영향력 확대를 노리는 짓은 공인으로서 절대 해서는 안 될 몰상식하고 파렴치한 행위로 여겨질 터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권과 문재인 정권을 차례로 거치며 한국의 제도정치는 중앙에서든, 지역에서든 이념투쟁을 빙자한 좌우 양 기득권 세력의 밥그릇 싸움의 장으로 걷잡을 수 없이 타락해버렸다. 극우도 알고 보면 강남에 값비싼 집 가진 사람들이고, 극좌도 알고 보면 강남에 고가의 아파트 소유한 사람들이다.

 

조은희는 앞에서는 과격하면서도 뒤에서는 영악한 이들 이데올로기 장사치들의 상당수를 서초구민으로 두고 있다. 진보좌파의 위선적인 ‘직업이 시민인 사람들’과 보수우파의 우악스러운 ‘직업이 애국인 사람들’은 왜 조은희 앞에만 서면 한결같이 그 즉시 온순한 양민이 되는 것일까? 조은희의 신간 「귀를 열고 길을 열다」에 그 오묘한 비밀을 풀어줄 열쇠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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