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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단일화가 역겹다

  • 이현중 메시지 크리에이터
  • 등록 2022-02-24 00: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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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년들이 싫다고 하면 싫은 거다

586은 미개하다


청년들은 정치꾼들과 꼰대들의 단일화 앵벌이에 구토마저 느낀다. (이미지 : 구글)

알 리스와 잭 트라우트가 공저한 「마케팅 불변의 법칙」은 특정 범주(Category)의 제품이 쇠퇴하면 그러한 범주에 속하는 상품들을 제조해 판매하는 개별 기업(Brand)들 역시 더불어 몰락할 수밖에 없다는 서늘한 통찰이 담긴 책이다. 이를테면, 임직원들이 무능하고 불성실해 코닥이 쇠락한 게 아니라 새로운 디지털 카메라가 기존의 필름 카메라를 대체하는 바람에 해당 회사가 어쩔 수 없이 시장에서 도태됐다는 논리다.

 

역사에서도 비슷한 사례는 수없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석기시대는 산야의 돌들이 고갈돼 끝나지 않았다. 석기와 비교해 훨씬 더 단단하고 편리한 청동기와 철기가 차례로 개발ㆍ보급된 여파로 수만 년을 이어져온 석기시대는 마침내 종식되었다. 상대성 이론을 정립한 위대한 천재 물리학자 앨버트 아인슈타인의 말마따나 인류가 핵폭탄이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3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원시시대로 돌아가지 않는 한에는 사람들이 전동드릴 대신에 돌도끼를 일상에서 사용하는 시대는 다시 도래하지 않으리라.

 

21세기 남한 정치에서는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선사시대의 원시인들처럼 돌도끼 들고서 비장하게 싸움터로 나서는 인간들이 여전히 도처에서 목격되고 있다. 지금부터 무려 35년 전에 치러진 1987년 12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생애 최초로 대선투표에 참여해본 경험을 여태껏 잊지 못해 오늘날의 2030 청년세대들 면전에서 선거철만 되면 어김없이 “라떼는 말이야~”로 시작되는 지루하고 철지난 장광설을 고장 난 녹음기처럼 지치지도 않고 늘어놓는 머리 허연 586 세대가 다름 아닌 그러한 원시인들이다. 대학물까지 먹었다는 이 미개인들이 손에 쥔 돌도끼의 이름은 다름 아닌 ‘후보 단일화’이다.

 

인간은 경험의 산물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경험의 산물에도 두 가지 종류가 별도로 존재한다. 첫 번째는 지나간 경험을 유연하고 창의적으로 해석ㆍ적용하며 경험의 주인으로 올라선 사람들이다. 두 번째는 과거의 경험을 맹목적이고 교조적으로 숭배ㆍ추종함으로써 경험의 노예로 전락한 군상들이다. 거짓되고 위선적인 내로남불의 곁불을 쬐면서 완전히 빛바랜 진보의 굴레에 여전히 갇혀 있는 대다수 주류 586들이건, 이념과 노선은 보수로 바뀌었음에도 태도와 심성은 예전 진보 시절과 전혀 다름이 없는 소수의 비주류 586들이건 경험의 노예로 묶여 있기는 피장파장이다. 청년들이 진보 586과 보수 586을 도매금으로 싸잡아 ‘꼰대’라고 야유하는 게 무리가 아니다.

 

586들의 머릿속을 확고하게 지배하는 정치문법은 딱 한 개이다. 김대중과 김영삼의 후보 단일화가 무산돼 노태우에게 패배했다는 케케묵은 체험담이다. 그로 인해 이들에게 ‘선거=단일화’가 되었고, 선거가 곧 단일화라는 인식이 구제불능으로 뼛속까지 스며들면서 586 세대는 선거를 이기기 위해 단일화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일화를 이루기 위해 선거운동을 벌이는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 되고 말았다.

 

문제는 그들이 신줏단지처럼 모시며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1987년은 스마트폰이 몸의 일부처럼 정착되고,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이 조만간 보편화될 2020년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옛날도 한참 옛날이라는 것이다. 단적으로, 1987년 무렵에 상큼하고 풋풋한 하이틴 스타로 혜성처럼 나타났던 채시라와 김혜수 같은 여성 배우들이 요새는 나이 먹어 시어머니 역할로 등장한다. 586들이 고집스럽게 손목에 차고 있는 정치시계의 시곗바늘만 1987년 12월에 영원히 박제돼 멈춰선 셈이다.

 

청년들과 단일화는 상극이다

 

좋다. 2002년에 노무현이 선거 막판 극적으로 성사된 정몽준과의 단일화 덕분에 이겼다고 인정하자. 그런데 대통령에 당선된 노무현이 대북송금특검을 밀어붙이고, 그 후과로 새천년민주당이 분당돼 열린우리당이 창당되고, 종국에는 참여정부가 폭망한 사태에는 노골적으로 경선에 불복해가며 노무현에게 단일화를 압박했던 후단협, 즉 후보단일화협의회의 준동과 행패 때문에 그가 받았던 심리적 충격과 정신적 외상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참여정부의 실패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은 무리하고 인위적이며 폭력적이었던 단일화 추진 과정에서 그 씨앗이 배태됐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단일화라는 독버섯은 끈질기게 살아남아 특정 정당은 물론 한국정치 전체를 부지런히 궤멸시켜왔다. 남한 진보정당에 대한 냉혹하고 무자비한 사형선고는 박근혜 정권이 통합진보당을 강제로 해산시키는 날 내려지지 않았다. 진보신당 심상정이 국민참여당 유시민에게 경기도지사 후보를 맥없이 내어준 날이 남한 진보정치를 불가역적으로 끝장낸 최후의 심판일이었다.

 

안철수 현상의 주인공 안철수가 단일화 소동의 주역으로 번번이 얼굴을 내밀며 본인의 위상도 추락시키고, 정치발전에도 역행하게 된 치명적 단초는 그가 박원순에게 뜬금없이 서울시장 후보 자리를 양보한 데 있었다. 안철수를 집요하게 따라붙는 고질병이자 주홍글씨가 된 철수정치의 출발이었다.

 

더욱이 단일화를 한다고 해서 꼭 이긴 것도 아니었다. 2012년에 문재인이 박근혜에게 진 건 야권후보 단일화에 실패해서가 아니었다. 문재인의 경쟁력 부족이 근본 원인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만약에 국민의힘 대선후보 윤석열이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이재명에게 패배한다면 이는 안철수와의 단일화가 불발돼서가 아니다. 윤석열 자체가 실력이 없는 탓이다. 동일한 이치에서 이재명은 심상정을 조기에 주저앉히지 못해 고전하는 게 아니다. 이재명 스스로의 자질과 도덕성에 심각한 하자가 있다고 다수의 유권자들이 판단한 까닭에 선거전에서 죽을 쑤고 있다.

 

그렇다면 단일화로 표상되는 586식의 낡고 식상한 정치공학을 가장 혐오하고 경멸하는 인구집단은 누구일까? 당연히, MZ 세대로 호명되는 현재의 2030 청년세대이다.

 

그들에게 단일화는 두 가지 연유로 말미암아 체질적으로 거부감과 혐오감을 일으킨다. 첫째로, 젊은 유권자들은 직설을 선호하는 세대이다. 그들은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것이다. 반면, 정치권에서 진행되는 단일화 협상은 시종일관 애매함과 모호함으로 점철돼 있다. 기인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니기 일쑤이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청년세대들 사이에서 인기와 지지가 시들해진 것은 그가 특별히 타락하거나 사악해져서가 아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명확하게 자기 의사를 표현하지 않는 안철수 특유의 성정과 화법이 ‘요즘 젊은 애들’과는 코드가 점점 더 맞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전적으로 안철수 개인의 불운의 소치라 하겠다.

 

둘째로, 후보 단일화는 청년들이 대단히 중시하는 공정의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들은 능력에 비례하는 보상을 받는 게 공정하며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단일화는 청년들의 시각에 준거하자면 능력이 달리는 후보가 순전히 요행과 운발로 승리의 월계관을 쓸 수도 있는 지극히 불공정하고 불합리한 게임이다.

 

단일화는 1+1=2를 얻겠다는 셈법이다. 때로는 2 이상의 결과를 산출하기도 했다. 허나 이제는 다 부질없는 옛날이야기일 뿐이다. 2022년의 야당후보 단일화는 소탐대실의 우가 되기 쉽다. 왜냐? 윤석열을 지지하는 기성세대 유권자와 안철수를 지지하는 기성세대 유권자를 억지로 힘들게 합쳐놨더니 윤석열을 찍으려던 청년층 유권자가 대거 이탈하는 희대의 자충수가 될 가능성이 엄청 큰 탓이다.

 

혹자들은 국민의힘 당대표 이준석이 단일화를 고의적으로 방해하고 있다고 볼멘소리를 해댄다.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청맹과니 발상이다. 이준석이 단일화를 훼방 놓은 건 진실일 수 있다. 그러나 이준석은 단일화로 표상되는 불공정하고 구태의연한 정치공학을 경계하고 경멸하는 청년세대의 민심과 여론을 거칠면서도 제 나름 충실히 반영해왔을 따름이다. 이준석의 핵심 지지기반인 청년들이 여의도 기성정치권의 부패한 모리배들끼리 밀실에 모여앉아 은밀히 속닥거리며 거간하고 야합하고 흥정하는 단일화가 죽기보다도 더 싫다는데 이준석이 무슨 용가리 통뼈라고 단일화에 앞장서 찬성할 수가 있겠는가?


싫다고 하는 걸 강요하면 인민대중은 처음에는 지겹다는 반응을 보인다. 그러다 강요하는 행위가 자꾸만 반복되고 길어지면 급기야 분노 섞인 역겨움을 표출한다.


청년들도 단일화가 싫다고 하고, 안철수도 단일화가 싫다고 하고, 이준석도 단일화가 싫다고 하고, 윤석열도 단일화를 별로 내켜하지 않는 기색이다. 그러니 꼰대들은 그 빌어먹을 단일화 소리 제발 좀 집어치우기 바란다. 단일화 타령이 지긋지긋한 단계를 지나서 바야흐로 슬슬 역겨워지기 시작해 그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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